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칼 왕의 무덤 (문단 편집) === 고대의 황금기와 몰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xo-mijan-marono-panoramica-ma1.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xo-mijan-marono-palacio-ma.jpg|width=100%]]}}}|| || 전성기 시절의 팔렝케 || 팔렝케의 왕궁 ||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은 615년부터 683년까지 무려 '''69년''' 동안 [[마야 문명]]의 도시 [[팔렝케]]를 다스린 군주로,[* 세계에서 5번째로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한정하면 [[캐나다]]의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오래 재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참고로 당시 한국에서는 한창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투닥거리다가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뤄지던 시기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676년이다.] 80세까지 장수하며 팔렝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다. 인근의 강대국 [[칼라크물]]의 침략으로 휘청거리던 팔렝케를 다잡고 인근 도시들을 정복해나가며 마야 문명 서부권을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이끌었던 것. 40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팔렝케에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들을 실시해서 궁전, 피라미드를 많이 지어놨다. 그렇게 오랫동안 팔렝케를 다스린 파칼 왕은 683년 8월 궁전에서 눈을 감았고, 이 비문의 신전 아래의 무덤에 고이 안장됐다. 팔렝케는 파칼 왕이 죽은 후에도 후계자 키니치 칸 발람 2세, 키니치 칸 조이 치탐 2세를 거치며 오랜 황금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711년 인근 도시 토니나의 공격으로 늙은 조이 치탐 2세가 붙잡혀 끌려가면서 종결되고야 만다. 치명타를 입은 팔렝케는 점차 쇠락했고, 800년대에 이르자 도시 자체가 붕괴했다. 팔렝케는 1520년대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정글의 암흑에 파묻혀 무너져갔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했을 무렵 팔렝케는 아무도 거주하고 있지 않는 폐허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alenque_before_excavation.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a-p-maudslay-photogravure-flora-y-fauna-palenque-the-palace-view-of-the-western-court-and-tower-looking-south-copy.jpg|width=100%]]}}}|| |||| 알프레드 모슬레이가 찍은 1890년의 팔렝케[* 첫 번째 사진에 나온 피라미드가 바로 파칼 왕의 무덤이 묻힌 비문의 신전이다. 두 번째 사진은 정글에 파묻혀버린 왕궁의 모습. 위에 나온 팔렝케 왕궁과 동일한 건축물이다.] |||| 그렇게 잠들어 있던 팔렝케는 1567년 [[스페인]] 출신 [[선교사]] 페드로 로렌조 데 라 나다가 처음으로 기록에 남기면서 역사에 재등장했지만 1773년까지도 아무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체계적인 조사는커녕 1786년에는 안토니오 델 리오 대령 휘하의 스페인 병사들이 스페인 국왕의 이색적인 취향을 맞추기 위해 팔렝케의 옥좌와 비석들을 통째로 뜯어갔을 정도.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800년대 들어서의 일로 그마저도 사진을 찍거나 그림 그리기, 비석들의 주형 떠가기에 그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